신용목 - 우리가 잊혀질 때
폐허에서 어둠을 길어 와 몸의 구멍 속에 붓는다 검은 고무로 끓고 있는 바닥, 얼굴이라는 기포들- 날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 터지는 눈빛들, 웃음들 서서히 꺼져가는 방안에서 나는 낮의 외투을 벗은 밤의 알몸을 안았다 그림자를 쪼아 먹는 까마귀처럼, 어둠의 딱딱한 부리가 발라내는 슬픔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든 빛깔의 합인 검정과 모든 풍경의 합인 어둠과 모든 슬픔의 합인 몸이 다시, 서로의 폐허를 껴안고 캄캄하게 합쳐질 때 발바닥에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같았다, 어둠의 속도로 길어지는 발자국들 팽팽하게 당겨지다 그 끝을 짚고 툭, 끊어질 때 드디어 몸 밖으로 넘치는 어둠의 주물 속으로 한 발 다음에 더 깊이 빠지는 한 발을 디딘다, 까마귀가 쪼아 먹는 그림자처럼 페허의 발밑에는 바닥이 없다 검은 고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