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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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
나비가 꽃에게로 착지할 때 휘청, 이는 꽃대와 꽃대의 과민이 무안하지 않게 짱짱한 봄햇볕처럼 빳빳해지는 고양이의 수염, 뒤에서 뒷짐 지고 넌지시 목을 빼고 있는 나를 의식하였던가 꽃이 나비를 흔들고 팔랑, 나비가 고양이를 뛰어오르게 하고, 채송화 톱니 같은 발톱을 마음먹고 착 내밀었다가 아차, 소득 없는 도약에 뭔가 계면쩍고 머쓱하여서는 고개를 틀며 살짝 웃은 것 같은 순간 어여뻐라 꽃과 나비와 고양이와 내가 한 숨결로 이어진 잠시, 꽃과 나비와 고양이와 내게 몰입 중인 누군지 모를 네 숨결까지를 붙들고 웹진 '문장' 2023년 3월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 2004
- 蘭에게 배우다 꽃이 묻더군 먼 길 돌아 나, 난 앞에 섰을 때 마음 줄 데 없어 난과 비밀 결사를 맺어보고자 했을 때 날 보는 건 좋은데 그러노라 뭘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보는 것이 외면이라면 그건 몹시 슬픈 일 나는 부끄러워졌지 본다는 건 다 외면이야 모두 보고 싶은 걸 보고 있을 뿐 세상엔 그래도 단 하나만을 위한 외면이 있지 않겠니 내 눈빛으로부터 그날의 기분을 알아맞히던 옛 연인처럼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니 항변을 하였지만 묻더군 꽃이 네가 머문 풍경들을 돌아봤니 등을 돌리지 않곤 그 무엇도 지나올 수 없지 멀어지는 등 뒤에서 태어나는 미지 비밀을 여전히 간직한 채 잊혀진 것들, 넌 일생을 바쳐 그들을 추억해야 한다고 난 이미 오래전에 네앞에 피어 있었다고 월간 '태백' 2..
태풍이 해안을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곳에서 날씨의 모양을 상상했다. 소라를 닮은 여름. 둥글게 몸을 말고 자신에게로 향하다보면, 점점 뾰족해지다가 뾰족한 끝에서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선풍기 뭉게구름 선풍기 뭉게구름, 아무 뜻 없이 선풍기 앞에서 뭉게구름을 떠올리다가 선풍기뭉게구름선풍기뭉게구름, 중얼거린 일조차 잊은 채 밥때를 맞는 것처럼, 구름은 제가 구름으로 불리는 걸 몰라서 비를 내린다. 물이 끓는 소리는 물에 찔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열어보면, 터져서 냄비 속에 담겨 있는 중얼거림처럼, 오늘 찌개는 좀 짜다. 물을 더 부을까? 화상병동 문앞에 꽂혀 있던 이름을 주머니에 넣고 왔다. 선풍기에 대고 아아아아, 하면 펼쳐지는 해안처럼, 여름은 제가 여름으로 불리는 걸 몰라서 가을..
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공중에도 골짜기가 있어서, 눈이 내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하얗게 사라지고 싶었지 눈은 쌓여서 한 나흘쯤,, 그리고 흘러간다 목소리처럼 , 그곳에도 공터가 있어서 털모자를 쓰고 꼭 한사람이 지날 만큼 비질을 하겠지 하얗게 목소리가 쌓이면, 마주 오면 겨우 비켜서며 웃어 보일 수 있을 만큼 쓸고 서로 목소리를 뭉쳐 던지며 차가워, 아파도 좋겠다 목소리를 굴려 사람을 만들면, 그는 따뜻할까 차가울까 그러나 사라지겠지 목소리 사이를 걷는다고 믿을 때 이미 목소리는 없고, 서로 비켜서고 있다고 믿을 때 빙긋, 웃어 보인다고 믿을 때 모자에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털처럼 아득히 흩날리며 비질이 공중을 쓸고 간다 목소리를 굴려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주저앉고 말겠지 두..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