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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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혼자서는 느리거나 빠르다 둘이면 조금 빨라지고 셋이면 조금 더 빨라진다 사랑에 빠질 째도 사랑이 빠질 때도 둘의 박동은 심장을 건너뛰고 셋의 박동은 심장을 벗어나기도 한다 희망이 달려갈 때도 희망이 달아날 때도 셋이면 경쟁이 되고 넷이면 전쟁이 된다 여럿이 부르는 신음을 우리는 화음이라 한다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이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첫 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오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물은 연둣빛이다 피어보지 못한 것들의 무연한 숨결 첫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어쩌다 활짝 따뜻한 물에서 꽃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까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 먹은 숱한 꽃봉오리들 적막히 입에 넣고 씹어본다..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눈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처진 눈의 내가 너무 눈을 굴리며 산 것 같다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목 짧은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다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펭귄 다리라든가 사막거북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큰 대자 사지를 가진 내가 너무 긴 죄를 지으며 살 것 같다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먹히거나 우리에 생매장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모래는 뭐래' 창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