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59 Posts
박정대
(창밖에는 비고 오구 있어요,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글을 읽으세요, 세르주 갱스부르**의 이니셜 B·B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읽으면 더욱 좋구요, 갱스부르의 노래가 없다면 갱들이 부르는 노래두 괜찮구요, 노래구 뭐구 글을 안 읽으신다면 더욱 좋구요) 1 반복 보잘것없는 육신의 횡포, 하나의 천박한 영혼이 되었다. 아아 잔혹한 세월과 병든 의식들이 질병처럼 우리들의 온몸을 휩싸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늪지의 풍경 속에서 하나의 천박한 영혼이 되었다. 정처 없이 바람이 불고사랑을 닮은, 결코 사랑이 아닌 하나의 사건이 페스트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 불온한 밤과 열병의 거리를 헤매며 그때 내가 읽었던 것은 무엇인가. 정처 없이 바람이 불고 열병을 닮은 하나의 페스트 같은 사랑이 나를 휩쓸고..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 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 가려 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생(生)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단편들' 세계사, 1997
창 밖에는 노을이 밀려오구요 燒酒 한잔 생각만 간절하구요 바람에 섞여 소문들 흘러가네요 나는 앉아서 늙어만 가요 내 눈꺼풀의 창문은 어둡고 쓸쓸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당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요 떠가는 염소구름도 이제는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금 추억 안에 서서 거리의 나무들과 함께 걸어가네요 거리는 이미, 하늘로 통하는 동굴의 입구 같은 별들이 무수한 길들을 만드는 밤이구요 '단편들' 세계사, 1997
그것은 풀리지 않는 욕망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하늘의 뿌리가 지상에 쓰며들 때 더러는 꿈속까지 비가 내려 잠든 욕망의 옆구리를 들쑤실 때 애인이여, 너를 덮고 잠들던 나의 곤고한 청춘은 한 장의 음화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갈증과 회환이 교차하는 새벽의 문턱에서 삶은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나를 엄습하고, 그 격렬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던 것은 어쩌면 그 아름답고 우울한 한 장의 음화였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게 어쩌면 낡은 구식 쟁기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경작할 마음의 밭이 없는 나는 늘 죽음 쪽에 가깝고, 죽음이 나를 수소문하는 저잣거리에서 나는 추억을 헐값에 팔아 넘겼으므로 홀가분하게 죽음에 자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상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한없이 습기찬 성..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눈은 처음엔 하염없는 영혼이었네, 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지금 내리는 눈은 제 몸을 숨기며 내리고 있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그렇게, 내리는 눈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네 고요히 음악만이 살아 있는 이 시간을 나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끔씩 내가 이토록 고요히 살아 있는 시간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시간을 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차가운 시간 위로 내려와 대지의 시린 살결을 덮어주는 그대 따스한 숨결을 나는 지금 음악처럼 듣고 있네 세상의 후미진 곳에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손바닥을 내밀어 눈물로 젖어드는 하늘의 사랑을 ..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 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 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 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15년
꽃은 작고 바람은 크게 흐르네 그런 어느 날 나는 너무나 약하게 태어났네 그래서 한 여자만을 사랑하기로 했네 한 여자에게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라는 말을 보게 되었네 이건 수사가 아니라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기에도 힘이 든다네 이슬은 작고 먼지는 크게 흐르네 사람들이 뭐라 해도 그대로 인해 나는 삶을 중지할 수 없었네 나는 감사하네 단지 한 여자를 노래하기에도 삶이 모자란다네 바람이 작고 나비가 너무도 크게 움직이네 나는 너무도 약하게 태어났네 그래서 한 여자만을 위해 최선을 해야 했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문학과지성사, 1995
밀룽가 거리에 바람이 불어요 그대와 함께 하루 종일 밀룽가 거리를 쏘다녔지요 발이 아플 즈음에 저녁이 왔구요 바람에 떠밀려 초저녁별들도 밀려왔어요 우리를 따라온 어둠이 건물에 하나 둘 불빛을 매달았구요 우리는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 밀룽가 거리의 이층 찻집에 들어갔지요 군데군데 호롱불이 켜져 있던 마구간 같던 실내 그곳에서 우리는 따뜻한 마유주를 마셨지요 창밖엔 이미 캄캄한 어둠이었는데요 간혹, 그대가 탁자 위 술잔을 채우던 소리는 이미 아름다운 음악이었지요 그해 겨울, 그대와 내가 숨어들었던 밀룽가 거리의 이층 찻집은 우리의 짧은 생애였지요 시끄럽던 중국인 거리의 홍등가를 지나가면 문득 나타나던 줄 없는 현악기 같았던 건물 한 채, 그대의 숨결이 내 가슴에 닿아 한 줄기 현으로 이어지던 곳 우리의 사..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내 家系를 물어오면 나는 내 마음의 좌측 심장을 관통해 흐르는 강물의 이름으로, 섬진족이라 말하리라 강가에 쌓아놓은 모래알들의 낟가리 그 따스한 모래 속에 발을 묻고 섬진강 물결 속에 손을 담그면 강바람은 내 얼굴을 모닥불처럼 피워 올리리, 따스하리 바라보는 풍경들이 내 시선에 익어 고용히 단풍 들어갈 때 은어떼 내 손금 속 강물을 따라 점점 가을로 올라오리니 그대가 나에게 가을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오면 그대를 데리고 하동 평사리 백사장으로 가리 처음부터 끝까지 맨발로 걸어 뜨겁게 단풍 드는 발바닥이 섬진족의 가을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횡행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위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 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백년 만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 가을을 뒤따라 온 노을은 몇억 년 만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강물 속으로는 어제 본 듯한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바람에 떠밀려 간 어제는 이미 아득한 전생입니다 물속의 새들은 젖지도 않고 가벼운 깃털로 이 生涯를 경쾌하게 건너갑니다 나는 내 눈동자의 카메라로 기념 사진 한 장, 박아둡니다 시간이 캄캄하게 익어가는 동안 인화되지 않은 어둠 속에는 나뭇잎 족장의 얼굴도 보입니다 물방울 속에서 물방울 속으로 그 자욱한 안개의 길들을 지나 내가 모르는 다른 길로 백년 만에 가을이 왔습니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
세상의 밤은 모두 전등사 아래로 온다 대낮의 폭설과 폭설에 뒤덮인 세상의 지붕들을 이끌고 와서는 하루 동안 어깨 위에 쌓여 있던 눈발들을 툭툭, 팔만대장경처럼 전등사 마당에 흩뿌려 놓는다 어둠과 함께 나의 生도 전등사 아래로 돌아온다 선수항 지나 반달 언덕쯤, 석모도 떠나가는 옛사랑의 뱃길 전송하던 눈 발이며 허공의 유목민처럼 떠돌던 눈송이 몇 개도 어둠과 함께 전등사 아래로 와 깃든다 지상을 떠도는 눈발들은 지금 모두 전등사 아래로 온다 전등사에 밤이 찾아와, 누군가 오래 淑香傳숙향전을 읽는 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들도 다시 전등사 아래로 돌아오는데, 낮에 내리던 눈발 아직도 여전히 남아서 서성거리는 이 밤을 한 잔의 찻물 속에서 고요히 끓어오르는 이 겨울밤을, 잠들지 못한 내 마 음이 끝내 불 밝히..
고통이 습관처럼 밀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일 거야 석양빛에 물든 검은 갈색의 바다, 출렁이는 저 물의 大地 누군가 말을 타고 아주 멀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 거야 그럴때, 먼지처럼 자욱이 일어나던 生은 다시 장엄한 음악처럼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지 북소리,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봐 고독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울릴 수 있는지 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 너를 뛰쳐나갔던 마음들이 왜 결국은 다시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오는지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온 것들이 어떻게 서로 차가운 살갗을 비벼대며 또다시 한 줄기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나는지 고통이 습관처럼 너를 찾아올 때 그 고통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 봐 고통과 깊게 입맞춤하며 고독이 널 사랑할 때까지 아무도 모..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랫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 고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아..
낯선 날들이 다가오리 오래도록 떠돌던 마음의 국경 이제사 떠나왔으니 낯선 바람들이 몰고 가는 말발굽 소리 생의 접경지대를 떠도는데 처음 보는 풀잎들과 처음듣는 시냇물 소리 낯선 날들이 다가와 새롭게 천막을 치며 고요하고 섬세한 부족을 이루리 떠돎이 이루는 그때그때의 생이 소리 없이 이어지리, 늑대들을 기르며 자작나무 숲을 지나 또 다른 생으로 나아가리, 구름들과 함께 흙냄새와 더불어 바람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리 생은 움직이는 것, 바람과 더불어 나아가는 것 낯선 날들이 다가와 우리를 축복할 때 생의 변방을 떠돌던 마음이 이제사 마음의 국경을 버리고 바람 속에 섰나니 그대는 흘러가는 구름 그대는 내 머리 위에 흩날리는 낙엽 낯선 날들이 다가와 그대와 나는 생 속에서 사랑도 모르고 사랑하리 서로의 냄새에 취..
조금은 어두운 대낮,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 아, 난 어지러워 무너진 언덕 너머에는 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 신열의 바다가 있네 어디로도 가려 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 있네 베티, 내 푸른 현기증과 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 베티, 기억하고 있니 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 그 아래로만 흐르던물결, 바람 불어 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 함께 출렁거리던 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 기억해? 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37도 2부의 숨결들, 나날들 전기 플러그를 빼면 달이 지네 조금은 어두운 대낮 막판의 희망이 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7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엄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위의 집들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 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 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 추억이 패달이었네 페허와 페허와 페허와 또 다른 페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패달을 밟으면서 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다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 사랑을 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 기형도[빈집]중에서 '단편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밤 내 노트북의 커서가 반짝일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가 바라보던 강물의 깊이와 그 강물이 흘러가 기르던 밤하늘의 화분에 담긴 별들을 생각한다 아무르 강을 내 오랜 기타처럼 연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슬픔은 검푸른 빛깔이어서 내 기타의 노래 소리 아득히 밤하늘의 별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슬픔들이 마르면 나무들의 영혼이 됨을 이제야 알겠다 목관악기의 가을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이제야 나는 조금 알겠다 자작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며 대지의 오랜친구들을 부를 때 삶은 현기증 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바람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의 위안 속에 잠길 수도 있다는 거, 이제사 알겠다 흠 있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이 지상의 거처, 흠 없는 영혼이란 없다! 슬픔이..
창포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들의 풍경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 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풋이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 눈, 싸락 눈, 싸락 눈의 화음和音 창포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줌의 쌀을 끓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발 속으로도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그대 집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사 그대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잔의 창포강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러시아 혁명 호텔은 낡았다 스팀에서는 가끔씩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자정 너머 라디오에서는 자작나무 쓰러지는 소리도 들린다 밤새 긴 철로를 따라 화물열차가 흘러갔을 것이다 러시아 눈발들은 기침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러시아 여자들도 담배를 피워 물고 헛기침을 한다 그녀들이 뱉어낸 침 속엔 러시아의 깊은 밤이 고여 있다 러시아의 밤에 나는 낡은 나를 생각한다 내 속의 낡은 고독을 생각한다 내 속에서도 밤새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며 자작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들은 가끔 음악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음악을 시로 바꾸어보기도 한다 나의 사랑은 낡은 러시아 혁명 호텔을 닮았다 나는 밤새도록 러시아 혁명 호텔에서 사랑을 한다 러시아 혁명 호텔 전체가 삐걱거리기도 한다 사랑은 간혹 낡아서 삐걱거리기도 하..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시인세계' 2006, 가을호
내가 사는 세탁선 아파트에 가을이 왔어요 가늘고 긴 목조건물의 복도를 따라 걸으면 삐걱삐걱 가을이 소리 나요 세상이 온통 출렁이는 물결 같아서 나는 세탁선 아파트에서 추억을 세탁하며 한 시절을 보내요 내가 사는 낡은 세탁선 아파트에 가을이 왔어요 당신을 잊기 위해 지난여름 무작정 나는 이곳으로 왔지요 테르트르 광장을 지나 구릉을 한참 걸어 올라가면 내가 사는 낡은 세탁선 아파트가 있어요 세탁선 아파트, 걸으면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는 가늘고 긴 목조건물 세탁선 그 모양이 마치 센 강 위에 떠 있던 세탁선 같아서 시인 막스 자콥이 붙인 이름이라지요 피카소가 연인 올리비에와 4년간 살았던 목조 아파트 세탁선 원래 세탁선 아파트는 에밀 구도 광장 쪽에 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목조 아파트 세탁선은 테르트르 ..
1 새우젓 장수가 지나갔다 2 네가 어느날 나뭇잎에 적혀 생의 엽서처럼 나에게로 왔으므로, 나는 이제서야 너를 읽는다 3 늦잠에서 깨어나 뒹구는 일요일이다, 내 생이 일요일 같기만 하다면, 나는 생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이다 4 세상의 모든 나뭇잎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 5 나뭇가지에 매달린 섬들이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 저녁이다, 아니 저녁이어서 가을이다 6 오래간만에 턴테이블 위에 낡은 판을 걸어본다, 레코드판에선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난다 7 모든 것이 다 시가 되고, 아무 것도 시가 될 수 없는 그런 저녁이 있다, 바로 오늘 저녁이다 8 집시들이 나뭇잎의 바이올린을 들고 창가로 왔다, 그러나 아직, 음악을 연주할 시간이 아니다 9 음악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가면..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뿔, 2007
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 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 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 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 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 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 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 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 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 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 李賀의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