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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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오은
우리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다. 커피를 시키니 네가 핀잔한다. 아까는 차 마시자며. 그러는 너는 왜 커피를 시켰는데? 되물으니 씩 웃는다. 술 마셨니? 반응이 심상찮아 물었더니 고개를 까딱인다. 대낮에? 응, 대낮부터. 차 마시자고 했을 때 이미 술 마시고 있었던 거야? 너는 대꾸없이 커피를 홀짝인다. 커피에 브랜디를 한 방울 떨어뜨리듯 조심스럽게. 마시면서 마시는 이야기를 한다. 브랜디가 커피를 파고들듯 자연스럽게. 차 마시듯 평화롭게. 커피 마시듯 태연하게, 술 마시듯 거침없이. 평화로움과 태연함과 거침없음이 한데 오른 테이블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굽힐 것 같다. 너는 흡수가 빠르구나. 네 얼굴에는 붉음과 불콰함과 불쾌함이 한데 모여 있다. 우리 사이에는 아직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골목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도 있고 큰길에도 있고 마트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다. 학교 정문에도 있다. 아들이 엄마를 삼십 분째 기다린다. 남자가 여자를 삼십 일째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삼십 년째 기다린다. 몸이 몸을 기다린다. 마음이 마음을 기다린다. 언제나 기다린다. 어디서나 기다린다. 도처에 기다림이 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성공을 기다리는 사람, 경쟁자가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어제의 영광을 다시 기다리는 사람, 내일의 행복을 처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기다림을 반복하는 사람과 기다림을 번복하는 사람이 있다. 골목을 서성이다 휴대전화를 여는 손이 있다. 간절한 순간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 앞..
축하해 앞으로도 매년 태어나야 해 매년이 내일인 것처럼 가깝고 내일이 미래인 것처럼 멀었다 고마워 태어난 날을 기억해줘서 촛불을 후 불었다 몇 개의 초가 남아 있었다 오지 않는 날처럼 하지 않은 말처럼 죽을 날을 몰라서 차마 꺼지지 못 한 채 '왼손은 마음이 아파' 현대문학, 2018
그곳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있었다. 누군가는 거기라고 했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거기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뼈 있는 농담이 들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 우리는 만났지, 인사했지, 함께 있었지. 어떤 날에는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지. 죽자 사자 매달리기도 했지. 죽네 사네 울부짖었을 때, 삶보다 죽음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너나없이 그곳을 찾던 때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너와 나는 선명해졌다. 다름 아닌 다르다는 사실이. 같은 취향을 발견하고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는 가까워졌다. 어쩜 잠버릇까지 일치하는지 몰라, 네가 말했을 때 너도 나도 흠칫 놀라고 말았지. 우리 사이에는 고작 그것만 남아 있었다. 내 앞에..
화장실은 만원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아슬아슬한 고비 위태위태한 순간으로 꽉 차 있었다 마려움은 가려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해소할 때까지 사람을 만원 상태로 몰아붙인다 내 몸 편히 누일 곳 없음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타일은 차갑고 빽빽하다 몸속 뜨거움이 야속할 정도로 몸에도 낯이 있다는 듯 어린이 전용 소변기 앞에는 아무도 서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도 꼿꼿하게 서 있다 버젓함과 의젓함은 이렇게 다르다 감정이 만원일 때는 참지 못해 화내고 참을 수 없이 울어버리지만 볼일이 끝나지 않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직전이 무기한 유예되고 있다 '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