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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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미스 충북 선발 대회 의상상 받고 와서 양장점 주인과 함께 카퍼레이드 하던 승출이네 누나는 지금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을라? 종합병원 병동 앞에 펄럭이는 만국기를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삼표연탄 삼륜 트럭 위에서 꽃종이를 흩날리며 소읍의 골목길을 누비던 풍경의 그 절묘한 보색대비가 떠올랐다 일부러 햇살이 잘 비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꽃들의 만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주말 한때 살아 있을 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누이와 살아가는 일이 순 견디는 자세로 움츠러든 나에게 봄날 이 햇살의 통속함이란 얼마나 깊고 감미로운가 벚꽃은 제 그늘마저 화냥기로 가리고 짜장면 배달 오토바이는 어느 벤치로든 어김없이 찾아든다 신기하지, 누이는 웃으며 공연히 먼 눈길을 햇살 속에 버려두지만 나는 안다 우리에게 찾아든 목숨 또..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아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 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비로소 따뜻해지는 내 슬픈..
여섯 살 눈 내린 아침 개울가에서 죽은 채 발견된 늙은 개 한 마리 얼음장 앞에 공손히 귀를 베고 누워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소리를 견뎠을 저문 눈빛의 멀고 고요한 허공 사나흘 꿈쩍도 않고 물 한 모금 축이지 않고 혼자 앓다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개울가로 걸어간 개 발자국의 선명한 궤적이 지금껏 내 기억의 눈밭에 길을 새긴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 지성사, 2010
술이 있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잽싸게 마시는 놈들은 평민이다 잽싸게 취해서 기어코 속내를 들켜버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 한 잔을 다 비워내지 않는 놈들은 지극히 상전이거나 노예다 맘 놓고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놈들은 권력자다 한 놈은 반드시 사회를 보고 한두 놈은 반드시 연설을 하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잡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잰다 한두 놈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슬슬 곁눈질로 겉돌다가 마침내 하필이면 천민과 시비를 붙는 일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다 한두 놈은 군림하려 한다 술이 그에게 맹견 같은 용기를 부여했으니 말할 때마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난다 끝까지 앉아 있는 놈들은 평민이다 누워 있거나 멀찍이 서성거리는 놈들은 ..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
보채다 돌아누워 결국 혼자 수음하는 여자 곁에서 달을 바라봤다 달나라 국경도 전쟁도 없이 달 하나의 이름으로 빛나는 저 유구한 통일국가 속살만 남아서 시인도 술꾼도 소녀도 여우도 관음의 실눈을 뜨게 하는 위대한 포르노그래피 여자와 나 사이에 달빛이 분단의 그림자를 포갠다 모두 환하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모처럼 우연히 만난 유명 시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묻자 그는 일행들에게 농담이나 건넬 뿐 내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술김에 또 지고 싶지 않아서 유명 시인이 되면 묻는 말에 대답 안 하고 그러는 건가 보지? 그렇게 혼잣말처럼 궁시렁거렸던 것인데 이윽고 유명 시인이 한마디했다 시인에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나는 좀 억울했다 도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서 진심으로 물었던 건데 그런 것 좀 자상하게 일러주면 안 되니? 어쩌다 아무런 연고 없이 합석하게 된 술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기 어색해서 곁에 앉은 여자 시인에게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러자 그 여자 시인이 대답했다 전과 다름없이…… 괜한 걸 물었다가 괜히 상처받는 이..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한 여자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구원은 없다, 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검은 커튼 아래서 죽었다 나는 술집에서 낮술에 취해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술잔에 머리를 묻은 채 울었고 그날 함박눈이었는지 새 떼들이었는지 광장에 가득 내리던 무엇인가에 살의를 느꼈었다 삶에서 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겨울은 위독하다 술 마시다 단 한 번 입술을 빌려주었던 대학 친구도 겨울에 죽었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과 가난한 애인 사이에서 떠돌다 결국 오래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랜 잠이 그녀에게 어떤 빛을 데려다주었는지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는 한낮이 나는 무덤 같고 삶에서 아무런 빛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우선 몸의 부피부터 부풀려야 한다 태양계보다 커야 한다 지구 밖으로 물러나 좀 살펴보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를 가볍게 제압한 후 태양 가까이 가져가서 자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그래도 도망간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도망간 여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집어등 밝힌 어선을 타고 오징어를 잡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강물과 바닷물을 비워낸다 너무 예리하지 않은 칼로 지구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아, 지붕들만 살짝 벗겨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핀셋으로 남자들을 골라낸다 좀 작업이 더딜 것 같으면 도처에 싸움을 일으키면 된다 남자들은, 어쨌든 무엇을 위해서든 뛰쳐나가지 않고선 배겨내지 못할 ..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장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비로소 따뜻해지는 내 슬픈..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대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귀울이는 시간을 공연했다 심야 영화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
사막도 제 몸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너무 오래 버려진 그리움 따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꽃 피고 비 내리는 세상 쪽으로 날아가 한꺼번에 봄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막을 떠나 마침내 낙타처럼 떠도는 내 고단한 눈시울에 흐린 이마에 참았던 눈물 한 방울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 지성사, 2010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
아버지는 위독했고 나는 군인이었다 북으로 행군 중일 때 갑자기 휴가증이 나와서 어리둥절 시외버스를 타고 애인 만나러 신림시장 순댓집에 가서 앉았다 가을이었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애인은 얼굴에 화장을 무섭게 하고서 내가 없는 사이에 저 혼자 간직한 일들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간과 허파와 순대를 골고루 섞었을 뿐 여관에 가서 또 술을 마셨고 나는 천천히 취했다 내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애인과의 섹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애인은 그새 많은 것에 깊어진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그새 더 많은 것에 가벼워져 있는 나를 배에 태우고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더 먼 바다를 불러줬다 그러나 나는 맹세코 운 것이 아니었다 커튼 밖에서 ..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 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전속력으로 달려가 톰슨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치타를 보면 먹이를 물고 나무에 오를 힘마저 탕진한 채 하이에나 무리에게 쫓겨 주춤주춤 먹이를 놓고 뒷걸음질 치는 치타를 보면 주린 배를 허리에 붙인 채 다시 평원을 바라보는 저 무르고 퀭한 눈 바라보면 쉰 살 넘어 문자 메시지로 전속력으로 해고 통보받은 가장을 보면 닳아 없어진 구두 뒷굽을 보면 거울을 보면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
출근길이 꼼짝도 않는다 지렁이 보폭보다 짧게 주춤주춤 엎질러지다 보면 저만치서 무슨 바구니 같은 데 올라타서 가로수 전지 작업하는 구청 용역 인부들 아침부터 길을 막고 저 지랄이냐, 하다 말고 가만 생각해보니 나보다 나무가 상전이다 출근도 명퇴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죽는 날까지 사람들 용역으로 부리며 세금으로 몸치장하는 상전들 국회의원 같은 자세로 일없이 서서 흙과 빗물과 햇빛과 바람까지 소집해 보좌관 거느리듯 앵벌이로 내세우는 하느님 마름 같은 불한당 놈들 저놈들 먹여 살리자고 나는 아침부터 길 위에 꼼짝도 못 하고 선 채 결국 나무 대신 사방팔방 삿대질이나 하고 이 지랄인가 근로소득세, 주민세, 고용보험료 벌러 가지 못해 쓰지도 못할 발암물질이나 푸들푸들 푸르르르 엽록소처럼 합성해내고 있단 말인..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등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 흔들리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
버스가 느리게 왔다 감기약 먹는 것을 잊어서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자취방은 멀고 먼 길 가다가 다 나을 수도 있으니까 기침과 고열을 조금만 견디자고 나는 나에게 힘을 주었다 어머니는 이제 생활력이 바닥이 나서 더 이상 생활비를 벌지 못한다 나는 생활비가 바닥이 났는데 생활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측량할 수 없었다 헌책방 책꽂이에 내가 판 삼중당문고 책들이 팔리지 않고 있어서 기뻤다 내게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천천히 달릴 수도 천천히 희망 같은 걸 가질 수도 있었다 아파서 세상에 주는 몸을 아끼려면 이제부터 상상력을 줄여야지 자취방은 멀고 먼 길 마침내 버스에서 내렸을 때 단풍잎 같은 사람이 와서 말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네 아버지가 죽었다고 나는 생활비가 바닥이 났는데 하필 아버지가 죽다니..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응달도 별자리도 없이 옛날만 있는 바다. 사랑도 편지도 문패도 모두 옛날에만 있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은 바다. 갈매기와 파도마저 옛날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다. 옛날의 애인이 울어주는 바다. 가만가만 울음을 들어주는 바다.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옛날의 모래와 햇볕이 성을 쌓는 바다.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그만인 바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지나간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잊히고 잊힌 바다. 이별마저 왔다가 옛날로 가버린 바다.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그 어떤 약속도 옛날이 돼버린 바다. 그래서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떠도는 바다. 내가 데리고 간 상처가 가만가만 양말을 벗는 바다. 모든 게 착해진 바다..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집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대부분의 파도는 육지에 닿기 전에 몸을 잃는다 살아서 오는 파도보다 푸른 해면에 제 흔적을 놓쳐버린 채 죽어버리는 파도가 더 많다 몸을 데리고 육지에 오르는 파도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의 자세를 잘 익혔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었으나 몸을 잃고 돌아서면서 파도는 내게 삼진 아웃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처럼 말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기 위해 달의 힘까지 빌려 몸을 일으켰으나 육지에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나의 길을 잘 마쳤다! 파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파도의 굳은살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 지성,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