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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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어리석음이 얼마나 달을 둥글게 하고 밝게 하는지 안다. 서편에 가서 지는 달이 깨끗하다. 누구를 만나 실컷 울고 사랑을 얻어온 얼굴이다. 나의 아침 길은 고요하다. 길의 고요 속으로 걸어가는 곳에 하지감자꽃이 먼저 들어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새하얀 꽃이다. 이이가 울음을 받아준 그이인가. 호반새가 돌아왔다. 작년에 울던 곳에서 운다. 가까이 가서 보았다. 내가 보는데도 울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운다. 짙은 주홍색이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라고 또 말할 만하다. 의외로 부리가 뭉툭하게 길고 끝이 갑자기 두렵게 뾰쪽해진다. 밤나무숲으로 날아갔다. 가서 또 운다. 몸과 부리에 비해 꼬리가 짧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것 같다. 지금 그쪽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차이..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이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저 혼자 돌아간다 '제 12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사상, 1998
한밤중에 일어나 세상사 생각할 수록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움 아무리 돌아눕다 돌아눕다 도로 일어나 앉아봐도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움 불 네 번 끄고 다섯번째 벌떡 일어나 세상사 요모조모 뜯어놓아도 세상은 다각적으로 미치겠음.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먼 데서 아주아주 먼 데서 움 너 이놈, 이놈 이 천벌을 받을 개보다도 못한 놈 불 끔 이하 생략 '누이야 날이 저문다' 열림원, 1999
작은 물고기들이 등을 내놓고 헤엄을 친다. 보리밭에서는 보리가 자라고 밀밭에서는 밀이 자라는 동안 산을 내려온 저 감미로운 바람의 발길들, 달빛 아래 누운 여인의 몸을 지난다. 달콤한 키스같이 전체가 물들어오는, 이 어지러운 유혹의 입술, 오! 그랬어. 스무살 무렵이었지. 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 끝에 서 있었어. 어둠에 파묻힌 내 발목을 강물이 파갔어. 비가 오고, 내 몸을 허물어가는 빗줄기들이 강물을 건너갔어. 그 흰 발목들, 바람이 불며 눈을 감고 바람의 끝을 찾았지.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단내 나는 바람! 나는 울었어. 외로웠다니까. 너를 부르면 내 전부가 딸려갔어. 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렸어. 그리움을 누르면 피어나던 어둠 속에 뜨거운 꽃잎들,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를 괴롭혔어. 집요..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바람 속을 뒤적이느라 손등이 까맣게 탔네요. 봄이 얼마나 더딘지, 또 얼마나 순식간인지, 거기 서 있지 말아요. 사랑은 다니던 길로 오지 않는 답니다. 생각은 이따가 하고 살며시 눈을 떠 날 봐요. 오! 밬처럼 두렵고 깊은 눈, 고개 숙인 수줍음이 사랑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사랑은 늘 한잎 목마른 수면과 수심 반반 바람이 지나는 그 사이이지요 사랑의 반을 넘어설 때 끝은 타고 속은 젖을 때 살랑살랑 애타게 한 잎 더 늘었지요. 잎은 생각보다 먼저 피지만 생각은 잎을 잡지 못한답니다. 달콤하게 깍지 낀 손을 놓고 갔다가 영영 못 올지도 모르는 목마른 물가로 밀려온 잔주름 같은 실버들 그 한잎.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어느날이었다. 나는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라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창작과비평' 2016년 봄 창간 50주년 기념호
오늘 아침부터 눈이 내려 당신이 더 보고 싶은 날입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눈처럼 불어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눈송이들은 빈 나뭇가지에 가만히 얹히고 돌멩이 위에 살며시 가 앉고 땅에도 가만가만 가서 내립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가 닿고 싶어요 아침부터 눈이 와 내리는 눈송이들을 따라가보며 당신이 더 그리운 날 그리움처럼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들을 보며 뭔가, 무슨 말인가 더 정다운 말을 드리고 싶은데 자꾸 불어나는 눈 때문에 그 말이 자꾸 막힙니다. '강 같은 세월' 창작과비평사, 1995
오늘은 뭐 하나요 고운 하늘 아래에서 당신은 어느 하늘로 서 있나요 나뭇잎은 다 피었습니다 무슨 꽃을 보나요 바람을 보고 해를 불러서 어디로 발길을 옮기나요 몇 가닥 머릿결이 이마로 내려와 해그늘을 만드네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옵니다 새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멀리 열려요 나는 그 하늘을 따라 그대에게 갔답니다 고요를 흔드는 바람같이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 잎 새로 나는 건너서, 가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든 햇살이 내 얼굴을 어른거리면 나뭇가지들을 가져다가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주고 구름이 지나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냉정과 우아를 알지만, 말하자면 사실, 바람은 디딜 발이 없어서 소리가 안 난답니다 비밀을 버린 당신 손에 한들한들 끈 가는 샌들이 들려 있네요..
속 날개가 날려요 눈 감았지요 어디서 본 듯 처음이네요 나는 먼 데서 왔어요 안아주세요 입 맞추어주세요 눈 떠 나를 봐요 나를 바라봐요 숨이 멎을 것 같아요 나는 속 날개를 접고 두 눈이 감겼답니다 '나비가 숨은 어린 나무' 문학과지성사, 2021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이 손등을 지나갑니다 이 바람이 지금 봄바람 맞지요? 라고 문자를 보낼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 당신에게 줄 이 바람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이 말이 그 말 맞네요 차를 타고 가다 어느 마을에 살구꽃이 피어 있으면 차에서 내려 살구꽃을 바라보다 가게요 산 위에는 아직 별이 지지 않았습니다 이맘때 나는 저 별을 보며 신을 신는답니다 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손에 닿겠지요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다음 토요일 만나면 당신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이 바람이 그 바람 맞네요, 하며 날 보고 웃겠지요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