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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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
지속적으로 흔적을남가는 움직임이 있다. 완고한 완만함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 땅속 깊이 뿌리에서 뿌리로 이어진다. 마음을 불어넣어 사람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멀리서 보면 회전하는 도형처럼 보입니다. 미묘한 울림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골라낸다.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미래를 건너가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 들입니다. 민들레의 갓털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공기가 들어가 있어 폭신폭신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몸짓으로 표현하려는 간절함이 있다. 색약의 빛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빛처럼 터져 나오는 긴장이 있다. 정지된 채로 확산되는 무한함이 있다. 도취되어 진행되는 조형적인 요소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부터 다..
1 목욕할 때 빼놓지 않아서 손목시계 가득 물이 찼을 때 문득 떠오른 사람 목욕을 하면서 문을 닫아 놓지를 않아서 마루에 걸어둔 시계에 증기가 가득했을 때도 또다시 떠오른 사람 그래서 계속 밖을 내다봤습니다 일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내다봤습니다 해가 지고 세상이 깜깜해질 때까지 사라질까 마음을 여닫고 낮추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열쇠를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사는 집을 찾으려 열쇠를 하나씩 하나씩 맞춰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은 어려웠습니다 2 내가 이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요 집에 돌아왔을 때 잠가놓은 문은 버젓이 열려 있고 누군가 집에 들어와 가져간 쓰레기통 가택수사 영장도 없이 불쑥 빈집에 들어와 하락도 없이 빼낸 것은 쓰레기통 냄새도 아니고 쓸쓸함도 아..
미술관 그림 앞에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보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 밤 낮에 본 사선의 빛 그림자가 자꾸 떠올라 잠을 못 이루다가 잠을 못 이룬 것이 그 빛 그림자에 겹쳐진 누구 때문인 듯하여 가까운 약속을 미루었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 다 사람 때문이겠지만 사람이 아니라 단지 과잉 때문이었다 나도 당신에게 과잉했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된 요즘이라면 해가 뜨더라도 바깥에 나가 사람 그림자를 밝거나 사람의 그림자가 몸에 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기분의 힘이라도 살아야겠다면 한없이 가벼워지라는 말을 들었다 자신을 만지라는 말이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끝을 모른다는 것 길 저쪽 눈부심이 있어도 가지 않으리라는 것 가지 못하리라는 것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그뿐 겨울은 잘못이 없으니 당신의 통점은 당신이 찾아라 나는 원인도 모르는 슬픔으로 격리되겠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옹호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우리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다. 커피를 시키니 네가 핀잔한다. 아까는 차 마시자며. 그러는 너는 왜 커피를 시켰는데? 되물으니 씩 웃는다. 술 마셨니? 반응이 심상찮아 물었더니 고개를 까딱인다. 대낮에? 응, 대낮부터. 차 마시자고 했을 때 이미 술 마시고 있었던 거야? 너는 대꾸없이 커피를 홀짝인다. 커피에 브랜디를 한 방울 떨어뜨리듯 조심스럽게. 마시면서 마시는 이야기를 한다. 브랜디가 커피를 파고들듯 자연스럽게. 차 마시듯 평화롭게. 커피 마시듯 태연하게, 술 마시듯 거침없이. 평화로움과 태연함과 거침없음이 한데 오른 테이블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굽힐 것 같다. 너는 흡수가 빠르구나. 네 얼굴에는 붉음과 불콰함과 불쾌함이 한데 모여 있다. 우리 사이에는 아직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 아무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당신은 나의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골목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도 있고 큰길에도 있고 마트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다. 학교 정문에도 있다. 아들이 엄마를 삼십 분째 기다린다. 남자가 여자를 삼십 일째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삼십 년째 기다린다. 몸이 몸을 기다린다. 마음이 마음을 기다린다. 언제나 기다린다. 어디서나 기다린다. 도처에 기다림이 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성공을 기다리는 사람, 경쟁자가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어제의 영광을 다시 기다리는 사람, 내일의 행복을 처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기다림을 반복하는 사람과 기다림을 번복하는 사람이 있다. 골목을 서성이다 휴대전화를 여는 손이 있다. 간절한 순간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 앞..
부질없지만 부질없음으로 더욱 부질없지만 4월이 4월에게 있었습니다 색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걸 적지는 않겠지요 4월의 눈이 아름답다 하는 동안 어떤 연두는 다 얼었는데 어린 잎들이 입을 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유입니다 어떤 자유는 패배 다친 곳을 묵묵히 들여다 보아요 우리는 왜 똑똑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사라진 연두에 대하여 그리고 밤에 읽는 죽음에 대하여 피해갈 수 없는 것을 두고 남은 사람은 여전히 어려울 것입니다 덧없고 찬란한 이것을 슬프고 아득한 그것을 그러니 어서 가도록 해요 가서 말하지 않도록 해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로즈와 마리는 하나였는데 어느 날 둘로 나뉘었다. 마리는 그런 줄 모르고 로즈와 하나인 듯 거기에 있었다. 그곳은 바람이 짜고 어느 날은 해가 구름에 완전히 덮이거나 어느 날은 해 말고 다른 것은 없는 날이 비가 올 때는 바다가 검게 그을려 빗물이 닿는 것마다 불같이 놀라곤 하였다. 로즈는 비에 젖어 마리가 짙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마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인지 둘이 된 것인지 하지만 마리는 로즈를 볼 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고 마리, 로즈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혼자 죽었다. 나는 네가 어떤 것은 평생 모르길 바라 그러면 살면서 거짓말은 하지 않고 무엇보다 품위를 갖고 마리, 죽기 전에 로즈는 생각했다. 네 자신으로 행복하면 좋겠어 마리는 그 후로도 여러 해를 살았다. '작가의 탄생' 민음..
봄은 오는 게 아니야 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 손목은 너무 세게 잡지 말고 갈 때 놓아주도록 살며시 살며시, 라는 말 울고 싶은 말이기도 한데 당신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빽빽한 숲에서도 한눈에 드는 나무가 있지 놓아준 나무 놓아준 손목 시끄러운 곳에서도 뒤돌아보게 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놓아준 것이야 그 소리 목소리도 가고 있는 거 원했던 건 가고 있는 거 가고 있는 건 고요가 되겠지 비유 너머에 있는 그것 너머라는 말도 울고 싶은 말이었는데 거기 알 수 없는 그늘이 있지 느릅나무 분재는 겨울에도 가득 초록잎은 달고 놓아줄 때를 잊고서 오래 머무는 건 정말 무서웠는데 쓸쓸하게도 머무는 사이 우는 법을 알아갔을 것이다 나무가 풍경에서 나갈 수 있도록 손목이 약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
축하해 앞으로도 매년 태어나야 해 매년이 내일인 것처럼 가깝고 내일이 미래인 것처럼 멀었다 고마워 태어난 날을 기억해줘서 촛불을 후 불었다 몇 개의 초가 남아 있었다 오지 않는 날처럼 하지 않은 말처럼 죽을 날을 몰라서 차마 꺼지지 못 한 채 '왼손은 마음이 아파' 현대문학, 2018
그곳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있었다. 누군가는 거기라고 했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거기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뼈 있는 농담이 들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 우리는 만났지, 인사했지, 함께 있었지. 어떤 날에는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지. 죽자 사자 매달리기도 했지. 죽네 사네 울부짖었을 때, 삶보다 죽음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너나없이 그곳을 찾던 때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너와 나는 선명해졌다. 다름 아닌 다르다는 사실이. 같은 취향을 발견하고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는 가까워졌다. 어쩜 잠버릇까지 일치하는지 몰라, 네가 말했을 때 너도 나도 흠칫 놀라고 말았지. 우리 사이에는 고작 그것만 남아 있었다. 내 앞에..
화장실은 만원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아슬아슬한 고비 위태위태한 순간으로 꽉 차 있었다 마려움은 가려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해소할 때까지 사람을 만원 상태로 몰아붙인다 내 몸 편히 누일 곳 없음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타일은 차갑고 빽빽하다 몸속 뜨거움이 야속할 정도로 몸에도 낯이 있다는 듯 어린이 전용 소변기 앞에는 아무도 서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도 꼿꼿하게 서 있다 버젓함과 의젓함은 이렇게 다르다 감정이 만원일 때는 참지 못해 화내고 참을 수 없이 울어버리지만 볼일이 끝나지 않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직전이 무기한 유예되고 있다 '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사, 2023
막차를 기다리며 시간표를 올려다 본다 문적문적해진 시간들이 시간표에 적혀 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일까 시간을 되돌리려 몸을 비트는데 자신의 혈관에 스스로 부딪혀 금이 간 시각표 한 귀퉁이에 생긴 균열 그 틈에 나방이 앉아 있다 기차에 올라 사무치게 울었던 시간도 간간이 그 이유를 물었던 시간도 펜 뚜껑을 열자마자 질질 흐르는 잉크처럼 용케도 이유가 찾아지지 않았던 시간에도 금이 가 있다 누군가도 등짝 잃은 사람처럼 아무 멱살에 안겨 어디 뜨거운 굴속으로 폭풍 속으로 들어가자 했을까 그곳이 막다른 시간의 저곳이어서 틈은 벌어졌을까 시간 사용자들의 균열을 받아내고 있는 저 시간의 못들 '찬란' 문학과 지성사. 2010년
우리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평등하게 죽음을 나눠 가졌지 ​엄마의 딱딱한 손 그 손을 잡고 말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복잡한 꿈이었는데 순서 없이 뒤섞여버린 현실이었는데 ​내가 죽은 건지 엄마가 죽은 건지 ​먼저 떠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백발이 덮어버린 이마를 쓸어 넘기다가 ​나는 어딘가 아파서 점점 어두운 표정을 갖게 되었지 엄마, 엄마는 어느 샌가 무너져 내리며 투명한 얼굴로 걸어가고 손을 앞으로, 앞으로만 내밀고 나는 그 손을 잡으려고 아주 오랫동안 수평선을 걸어왔지 ​우리는 나란히 걷다가 비 내리는 꿈속에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뒤돌아선 엄마의 유리알 같은 모래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마지막 기후 ​우리는 순서 없이 섞여버린 따뜻한 물이 스며드는 삶 안에서 서로..
각자의 말들로 서로를 물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어둠과 다른 색 ​오래 전 이동해 온 고통이 여기에 와서 쉬고 있다 ​어떤 불행도 가끔은 쉬었다 간다 ​옆에 앉는다 ​노인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흰 이를 드러내며 나는 웃고 ​우리의 혼혈은 어떤 언어일지 생각한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 지성사, 2019년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에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진물이 말라붙은 거즈를 보면 그들은 어느새 한몸이 되어 있다 굳이 누가 원했다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그렇게 말도 없이 애를 낳고 살림을 차리고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쏙 빠지고 이야기만 남지 않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데려와 생각날 때마다 흔드는 이들은 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행한 상처만 기억하니까 불행할수록 기억이 많아지니까 마데카솔 광고는 처음처럼 돌아온다 돌아온다는데 누구라 처음을 알까 고쳐 앉으며 돌아누우며 비루한 지상의 상처를 믿어보는 것 영리한 사람은 기억하고 선량한 사람은 이해하겠지 물집이었던 시간에 칸칸이 세 들어 우린 이전을 이미 살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년
만나러 가는 사람이 되어 걸어가고 있다. 좁은 골목 저 끝으로 사람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휘날리는 옷자락. 흩어지는 웃음소리. 밤의 수군거림으로 번지는 오래전 뒷모습. 풍경으로 스며든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이미 풍경을 지나친 뒤였다. 잊어버린 사람을 다시 잊어버린다는 것. 물러난 자리에서 다시 한 발 더 물러난다는 것. 만나러 오는 사람은 인상이 평범하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다. 구름이 구름을 불러 모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사이. 수풀 뒤편의 샘물줄기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사이. 나 자신을 연기하는 나 자신이 되어 만나러 가고 있다. 다가가는 것 만큼 멀어져가면서. 만나러 가는 사람이 만나러 오는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 순간순간..
새들은 어서 와요 새들은 어서 와서 쉬어요 며칠은 길고 언덕은 늘어나고 이제는 없는 것을 따라가면 꽃은 시들어가는 것 들어가도 될까요 물들어도 될까요 막다른 곳으로 가듯 길을 나서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도착하게 되는 것 믿어도 된다고 묻어도 된다고 걸음을 되돌리며 건네는 말이 있어 두려움이란 말은 더는 쓰지 않는 말 새들은 어서 와요 빛은 이곳으로 들어와요 꿈에 들어와 조용히 눕는 것은 이제는 없는 옛날의 어머니 예쁘고 정답고 꿈 많은 어머니 숨바꼭질하듯 숨어버려서 이제는 찾을 수 없는 나무 그늘 아래 새들은 이리 와요 빛 한가운데로 와서 편히 누워요 누워서 쉬어요 쉬었다 날아올라요 연기처럼 세월처럼 어제처럼 회오리처럼 순간의 기적처럼 드러누운 자리에는 그림자의 기척이 있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