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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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이병률
1 목욕할 때 빼놓지 않아서 손목시계 가득 물이 찼을 때 문득 떠오른 사람 목욕을 하면서 문을 닫아 놓지를 않아서 마루에 걸어둔 시계에 증기가 가득했을 때도 또다시 떠오른 사람 그래서 계속 밖을 내다봤습니다 일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내다봤습니다 해가 지고 세상이 깜깜해질 때까지 사라질까 마음을 여닫고 낮추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열쇠를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사는 집을 찾으려 열쇠를 하나씩 하나씩 맞춰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은 어려웠습니다 2 내가 이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요 집에 돌아왔을 때 잠가놓은 문은 버젓이 열려 있고 누군가 집에 들어와 가져간 쓰레기통 가택수사 영장도 없이 불쑥 빈집에 들어와 하락도 없이 빼낸 것은 쓰레기통 냄새도 아니고 쓸쓸함도 아..
미술관 그림 앞에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보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 밤 낮에 본 사선의 빛 그림자가 자꾸 떠올라 잠을 못 이루다가 잠을 못 이룬 것이 그 빛 그림자에 겹쳐진 누구 때문인 듯하여 가까운 약속을 미루었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 다 사람 때문이겠지만 사람이 아니라 단지 과잉 때문이었다 나도 당신에게 과잉했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된 요즘이라면 해가 뜨더라도 바깥에 나가 사람 그림자를 밝거나 사람의 그림자가 몸에 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기분의 힘이라도 살아야겠다면 한없이 가벼워지라는 말을 들었다 자신을 만지라는 말이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막차를 기다리며 시간표를 올려다 본다 문적문적해진 시간들이 시간표에 적혀 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일까 시간을 되돌리려 몸을 비트는데 자신의 혈관에 스스로 부딪혀 금이 간 시각표 한 귀퉁이에 생긴 균열 그 틈에 나방이 앉아 있다 기차에 올라 사무치게 울었던 시간도 간간이 그 이유를 물었던 시간도 펜 뚜껑을 열자마자 질질 흐르는 잉크처럼 용케도 이유가 찾아지지 않았던 시간에도 금이 가 있다 누군가도 등짝 잃은 사람처럼 아무 멱살에 안겨 어디 뜨거운 굴속으로 폭풍 속으로 들어가자 했을까 그곳이 막다른 시간의 저곳이어서 틈은 벌어졌을까 시간 사용자들의 균열을 받아내고 있는 저 시간의 못들 '찬란' 문학과 지성사.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