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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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가는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그를 찾으러 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주와 보라와 하양 그리고 둥긂, 물방울이나 무지개 그 속에 갇혀 나 한나절 헤매고 다녔으니 유혹하는 헛꽃처럼 냄새만 흩어놓고 그는 사라졌고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비 어미의 어처구니를 감싸며 저무는 노을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번지며 한사코 저를 숨겼다 그는 내가 찾아다니는 것보다 숨는 속도가 늘 빨랐으며 그 작은 나비들이 뭉쳐 빚어 놓은 허망한 빛 숭어리, 이윽고 한숨처럼 연기처럼 흩어져 날아가는 나비 동작 속에 우리는 지워지고 망연한 눈길 속에 꺼졌다 사라진 어제가 있었다고 언제나 믿고 싶었다 '상상인' 2023년 1월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꿈에서 벗어나 안심을 쓸어내린다 잃어버린 신발 찾아 헤매다 깨어나 뿌리 밑에 숨었는지 먼지 뽀얀 하늘 속에 빠트렸는지 나쁜 마음먹은 마음이 있다 잃어버린 꿈을 꾼 날은 빛이 유난히 밝다 언젠가 몽골 초원의 툴강에서 빠트린 신발 울란바토르를 거쳐 바이칼에 이른다 했다 한평생 나는 이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새들에게 신발이 있던가 바람에게 신발이 있던가 신발 없는 나무들은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구멍 뚫린 그림자에 검독수리가 빙빙 돌며 날아다니는 그 꿈 '현대시학' 2023년 5-6월
'어안'이 '어이없이 말을 못 하고 있는 혀 안'에서 왔고 '벙벙하다'는 '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에서 왔다는데 ,무심코 찾아온 이 말이 정작 어디서 온 건지 왜 떠올랐는지 마냥 얼떨떨한 순간이여 내 낡은 수첩 갈피에 어안이 벙벙한 순간 얼마나 빼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내 속은 또 얼마나 뒤집혔던가 넙치 눈알처럼 벙벙한 눈빛 감추고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모면한 일은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무참하고 참담한 날들의 차마 담아내지 못한 말들 늘 입안에 맴돌고 뱉지 못한 말 누런 가래로 목에 들러붙어 내 어눌한 쉰 목소리로 삐져 나오나니 예순 몇 해를 지금 소환해 물어보거니와 생 그 한마디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자다 일어나 입술 핥으니 말라붙은 말들, 차마 붙잡을 수 없던 말들, 마른 지푸라기 꿈자리여서 네가 와 앉았다 간 걸까 뭐라 뭐라 쏟아낸 말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다만 풀어헤친 잠옷의 단추 물에 빠진 네가 움켜쥔 열 손가락 하나하나 끊어내고 나는 도망쳤지 네가 내뱉은 말들, 허우적거리며 소용돌이쳐 가라앉는 네 말들, 소금처럼, 물에 녹는 소금처럼 아아, 그러나 햇빛 들면 다 사라질 말들, 막막한 시공간을 헤매는 중음신의 말들, 입술에 허옇게 말라붙은 말들, 그예 말들은 살아오지 못하고 그 격렬했던 꿈의 말들, 되돌리지 못할 꿈자리가 죽은 꽃나무 같아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혼자서는 느리거나 빠르다 둘이면 조금 빨라지고 셋이면 조금 더 빨라진다 사랑에 빠질 째도 사랑이 빠질 때도 둘의 박동은 심장을 건너뛰고 셋의 박동은 심장을 벗어나기도 한다 희망이 달려갈 때도 희망이 달아날 때도 셋이면 경쟁이 되고 넷이면 전쟁이 된다 여럿이 부르는 신음을 우리는 화음이라 한다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이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첫 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오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물은 연둣빛이다 피어보지 못한 것들의 무연한 숨결 첫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어쩌다 활짝 따뜻한 물에서 꽃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까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 먹은 숱한 꽃봉오리들 적막히 입에 넣고 씹어본다..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눈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처진 눈의 내가 너무 눈을 굴리며 산 것 같다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목 짧은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다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펭귄 다리라든가 사막거북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큰 대자 사지를 가진 내가 너무 긴 죄를 지으며 살 것 같다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먹히거나 우리에 생매장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이윽고 흰 바탕만 여기 남을 것이네 나는 없네 애초에 없었던 시선 밖으로 사라질 것이네 흰, 흰 빛 속으로 손닿을 수 없는 거리 애타도록 불러야 할 그것이 없네 어느 개울가 손 씻다가 고개 돌려 바라보는 문득 희미하게 바래가는 인화지 한 장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년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
어떤 절박함이 떠민 것일까요 이끄는 발길 따라 숲에 들었습니다 바깥의 숨찬 공기도 이곳에선 그 저 팽팽하게 부풀어오를 뿐 새삼 침묵은 비수되어 시간의 겹 가르고 있습니다 땅 속에는 그러나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이 악물고 나무는 날아 오르려는 잎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묵은 칡넝쿨이 나무의 몸을 휘감아 파고들고 무엇을 견디는 것일까요 나무는, 하지만 바로 그때 컴컴한 숲속 한구석 갑자기 터질 것 같은 탱탱한 공기의 움직임 짙푸른 잎 그늘 숨죽인 무당거미와 그곳을 향해 막 날아오르려는 잠자리 한 마리 천만 겁 인연의 시공이 겹쳐 만나는 그 순간 어디서 한 줄기 환한 빛이 터져나왔습니다 알 수 없는 떨림 숲을 흔들고 일제히 풀려나 솟구치는 푸른 함성 물고기 들이 춤을 추며 몸 속으로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
몸이 빚어낸 꽃이 나비라면 저 입술, 날개 달고 얼굴에서 날아 오른다 눈꺼풀이 닫히고 열리듯 네게로 건너가는 이 미묘한 떨림을 너는 아느냐 접혔다 펼쳤다 낮밤이 피고 지는데 두 장의 꽃잎 잠시 머물렀다 떨어지는 찰나 아, 어, 오, 우 둥글게 빚는 공기의 파동 한 우주가 열리고 닫히는 그 순간 배추흰나비 분가루 같은 네 입김, 어디에 머물렀던가?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문학동네, 2023년
소줏집에서 등골 안주가 사라졌다 광우병 탓이다 광우병의 잠복 기간은 5년, 올해 86세 친구 아버지 광우병 파동 뉴스 본 뒤엔 퇴근길 아들이 자주 사들고 오던 등골에 젓가락 일절 대지 않더라고, ​또 이런 이야기: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는 게 유일한 낙인 82세 장모님 며칠째 칩거하시는데 사연인 즉, 말기암에 걸린 그 할마씨 점심상에서 얼굴 마주하면 도무지 밥덩이가 넘어가질 않아서, ​아흔을 넘기고는 끼니마다 밥공기에서 밥 덜어낸다는 시인의 외할머니, 며느리 볼일 보러 나간 밥상에서는 식은밥 한 공기 말끔히 비우신다는 할머니,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아, 그랬던가 무릇 생(生)이란 쥐면 꺼지는 봉곳한 공갈빵처럼 속이 비어서 산수국 헛꽃에 죽자고 달려드는 저 겹눈의 허기에 바닥은 없다 '달과 뱀과 짧..
어디서 피어오르는가 물안개 물에서 피어나고 메아리 첩첩 산에서 울려퍼지듯 사랑은 어디서 피어오르는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듯 너 없이도 혼자 피어오르는 것이 또한 사랑이어서 저 혼자 삭고 삭혀서 술이 되어 노래가 되어 입술을 적시니 오늘 나 옛 노래의 청라언덕에 올라 대지에서 피어나는 흰 나리처럼 내가 네게서 피어날 적에, 네게서 내가 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게서 피어오르는 기적을 만나느니 가지 꺾고 뿌리까지 파봐도 꽃잎 한 장 없는 나무에 봄마다 환장하게 매달리는 저 꽃들, 꽃들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문학동네,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