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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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하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어쩌면 영영 모를 일인 줄도 모르고 오래된 수첩에서 마른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뜻밖의 곳에서 너를 만나는 일, 누구의 계획인가 출발도 없이 도착해 있는 하루가 지워진 것 사라진 것 기억되지 않는 것이 되어 물꽃으로 붓꽃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때로 뜻밖의 답서로 도착하는 너, 누구의 부름인가 이별에서 사랑으로 노래가 막 바뀔 즈음 맞은편 골목으로 오는 너에게 건네는 흔들리는 안녕 부를 수도 없고 부르지 않을 수도 없는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이 뜻밖 이렇게 되는 줄도 모르고 물가에 흰 꽃은 오늘도 이름 없는 물소리로 피어나는 나날들 세상에 온 것들은 뜻밖에 끌려 나온 것들인지 몰라 모든 뜻밖은 우리의 특별이 되어가는 것들인지 몰라 지금은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는 게 아니라 어딘가를 가기..
겨울나무 코끝에 흘러내린 두 열매를 보고선 벽에 부딪히고 있어요 뿐인가요, 극약 같은 두 열매 사이에서 사랑이냐 이별이냐 대신 사랑이냐 꿈이냐 사랑을 저울질하고 있어요 양털처럼 엉킨 마음이 양치기와 마주쳐요 엉켜버린 마음이 쫓기느라 나는 사랑과 꿈 사이를 달리는 그림자가 돼요 물 한 모금에도 취해 비틀거리는 그림자요 취해서 당장 집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깔끔한 방법은 이별이란 것을 아는 그림자요 한숨이 수차례 벽을 파고들어요 열매가 결실이 되어서야 낙하하게 되어서야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 좁은 구멍이 보여요 유일하게 감당 가능한 크기네요 그냥 좁은 게 아니라 상당히 좁아요 좁아서 좋아요 좁디좁으면 고민하지 않고 이별해도 되잖아요 이별해도 우리가 멀어지지 못하잖아요 멀어지지 못할 공간이라 할지라도 늦추고만 싶..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돌아가셨다는 거 말은 가끔 씨가 되고 돌아가시다, 라는 말이 있어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3년 봄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 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 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을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제15회 소월시문학상작품집' 문학사상사, 2001
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 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오늘도 실패했구나 생각하며 경련이 이는 얼굴, 빗물받이처럼 두 귀가 쇠구슬 같은 눈물을 모으는 얼굴, 보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통과되고 있는 얼굴, 골똘히 잠든 얼굴, 약간의 근육운동이 약간의 희로애락이 미미하게 정차하다 떠나는 얼굴, 뒤통..
휴대폰을 보니 ‘오후 8시경에 비 예상됨'이라는 안내가 뜬다. 구글에서 보내온 날씨예보다. 정말 8시에 비가 올까? 지금은 7시 38분. 조금 전에 해가 완전히 졌다. 창밖은 캄캄하고 멀지 않은 농구장에서 누군가 혼자서 농구공을 튕기는 소리가 들린다. 두시간 전에는 '오후 6시경에 비 예상됨'이라고 떴다. 6시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7시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 8시에는 정말로 올까?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 비가 오면 얼마큼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빗속을 통과하는 운전, 우중 운전을 해야 한다. 퇴근해서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길어야 30분. 30분 동안 비를 맞으며 나의 차는 갈 것이다. 정말로 비가 온다면, 비가 오는 시간에 맞춰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집까지 운전해서 가..
콘서트홀의 복잡한 인파를 빠져나와 홀로 가장자리를 거닌다 그동안 드넓은 백지 같은 평화가 찾아오길 기다렸지만 생각해보면 내게 찾아온 평화는 모두 여백 같은 평화 음악이 다 잦아들기도 전에 짝짝짝 박수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당탕 밖으로 걸어나가다니 가까스로 고이게 된 여운을 아무렇게나 발로 흩뜨려버리다니 대체 다들 뭘 어쩌자는 건가 여백에 낙서라도 하듯 천천히 가장자리를 거닐어본다 다 썼다고 생각한 종이에는 실은 생각보다 여백이 더 많았고 그 여백을 한가로이 거닐어보는 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이다 아무 생각도 안 하면 가장 좋겠지만 가장 흰 백지를 가질 수 있겠지만 나는 오늘 이렇게 다 하고 난 생각의 변두리 같은 곳 거닐고서야 비로소 평화 비슷한 무엇을 느낀다 지금 평화는 어디 높이 있는 게 아니라..
여태껏 당신은 비틀거렸고 행운을 빌었고 피 섞인 발자국들을 내내 흘렸어요 침묵만이 우리가 돌 수 있는 유일한 궤도 저주받은 신탁을 나르는 해골 부대에 화염병을 던지는 나날이었어요 우리는 불경한 계보의 최후처럼 길 한가운데서 내리고 있는 밤비를 꺾어 서로의 눈을 찔렀죠 ​목소리가 들러붙은 곁은 물컹해서 포옹이 돌아서면 안을 가득 채우던 다정한 호흡들이 터지면서 벽에 붙은 채 눅진하게 흐르는구나 누구는 심장이 멎고 있는데 나는 이토록 평화롭구나 서로에게 붙잡고 흐느낄 수 있는 난간을 선물하는 것 그게 청보리밭을 걷는 마음과 같아질 수 있을까 꿈이 속도를 급하게 줄여 내부가 덜컹거렸고 너머는 아주 더 너머로 빈자리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끝내도 될까요 하지만 당신은 네가 살아가는 모..
벚꽃하고 헤어진 지 참 오래되었다 지난봄과는 다음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곤 한 번도 못 만났다 토요일이 수십 번 저 혼자 떠나가고 나만 모시나비처럼 그를 만나려고 길 위를 서성였다 햇빛은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몰라 수십 번 단추 끝에 찬찬 감아두었다 이슬의 몸이 어제보다 깨끗해졌다 뒷산에 종잇장처럼 햇살이 쌓이고 햇살 낭떠러지 끝에 서서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백로지 같은 눈이 내리면 저 순한 벌레울음을 어느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하나 세 번 생각했다 익은 열매들이 발등에 떨어지고 가을이라는 말이 계단을 굴러간다 마음이 자꾸 극지를 향하고 있다 '시산맥' 2022년 겨울
작약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밝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듯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각날 듯이 ​모레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창작과비평' 2023년 여름
살구나무가 등을 살짝 굽힌 채 큰길 너머 사잇길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비켜서지 못한 바람이 울컥 치미는 향기를 쥐여주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깐 마음이 휘청거렸지만 아쉬움이 묻은 얼굴을 파란 하늘에게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오래 걸었던 풍경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고 익숙해진 인연도 여기까지라고 몸을 돌려 뒤돌아갔다 동백꽃이 툭 툭, 죽비를 치며 떨어지는 날이었다 '시와문화' 2023년 여름호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볼 때 그녀가 싫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아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볼 때면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는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끊어지는 것들을 꿰고는 했다 미동 없이 한참을 꿰다가 잠에 들어가던 그녀가 말했다 지금 들리는 음악이 좋아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가 싫었다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으니까 잠에 든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방 한칸이야 더는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짙고도 푸른 작은 방 * 쳇 베이커의 노래.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창비, 2022
눈사람 인구는 급감한 지 오래인데 밖에서 뛰놀던 그 많던 아이들도 급감한 건 마찬가지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면 그냥 눈만 남고 그래서 얼마 전 눈이 왔을 때 집 앞 동네 놀이터 이제는 흙이 하나도 없는 이상한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봤을 때 그건 이상하게 감동적이었고 그러나 그 눈사람은 예전에 알던 눈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거의 기를 쓰고 눈사람이 되어보려는 눈덩이에 가까웠고 떨어져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아보려는 새하얀 외침에 가까웠고 그건 퇴화한 눈사람이었고 눈사람으로서는 신인류 비슷한 것이었고 눈사람은 이제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고 남은 눈이 녹고 있는 놀이터 사람이 없어질 거란 생각보다 사람이 없으면 눈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놀이터를 더욱 적..
나이지리아에서 왔어 나이는 몰라 사장님이 그러는데 내가 한국에 온 지 삼십 년 됐대 아빠는 부인이 다섯이야 엄마는 둘째 부인이나 셋째 부인일 거야 나한테 뽀뽀를 잘 해줬어 근데 난 넷째 부인을 닮은 것 같아 일 끝나면 공장사람들은 다들 고향 얘기를 해 그럴 때면 나도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혼자 가만히 있을 때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아 고향을 생각하면 이상해 내가 아는 고향과 진짜 고향이 다르면 어떡해? 내가 아는 바로 그 고향에 갔는데 기쁘지 않으면 어떡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어리고 나만 혼자 늙었을지도 몰라 난 멀리 와서 매일 일을 해 이젠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아졌을 거야 고향에는 일자리가 없어 사람들은 낮에도 자거나 술을 마셔 가족을 괴롭히면서 ..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읽을 수 없는 시는 아름답다 어느 계절의 여행처럼 시는 휴일도 없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럽다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매일, 매일 매일 문 너머 풍경은 여전히 일상인데 시는 읽을 수 없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눈과 입을 꿰맨 향기로운 시체를 안고 천 년을 살았다는 어느 왕처럼 나는 아침마다 시를 받고 계단을 내려가 마른 꽃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시는 휴일도 없이' 걷는사람, 2020년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세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창비, 2018
있다는 것만으로도 결은 발생합니다 숨결이거나 물결이거나 바람결이거나 한번 일어난 결은 번져서 끝까지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의 파장과 당신의 파장이 만나는 순간을 파도가 쳤다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주파수가 맞으면 소리가 나오는 라디오처럼 당신의 신호를 기다립니다 그러나라는 당신, 당신의 그러나 당신의 기척이 내게로 전해질 때 나는 몸 밖으로도 핏줄이 흐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호흡에 나의 호흡이 묻혀 갈 때 우리의 심장은 서로를 흉내 내며 뛰었지요 보이지 않더라도 전파처럼 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잠시 지지직거리며 나는 나에게 몰두합니다 이미 온 감기처럼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당신을 찾아내었을 때 나는 어린 당나귀처럼 마구 나를 흘리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 2022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밤새 젖은 풀 사이에 서 있다가 몸이 축축해진 바람이 풀밭에서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있네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 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 '두두' 문학지성사, 2008
얘야, 자두꽃이 한창이구나 불면의 신경 마디마디를 지우는 꽃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데 벼락은 깜깜함에 눈먼 것들을 잘도 찾아가는구나 얘야, 생활이 편할수록 무르팍이 불편하구나 비를 켜는 악기, 먹구렁이 울음이 보고 싶구나 먼 데 있는 산사나무 그늘이 불어나듯 내 몸이 몹시 가려워지는구나 나는 캄캄한 무르팍 펴고 앞산에 나가 취 뜯고 들깨 모종을 해야 한단다 빈속이 허하도록 데면데면 놀아야 한단다 나는 흙으로 다시 오지 않으려 종교도 없이 지냈단다 얘야, 목이 마르구나 내게 이 빠진 호미를 다오 호미 끝엔 환한 세상이 와 있단다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창비, 2016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갯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춧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 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니고 살지 않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바람속의 영혼처럼 눈이 날린다 홀로 걷다 돌아보니 나홀로 청년들이 실업에 울고 있다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잠을 청한다 청해도 잠은 안 오고 짙어진 나뭇잎 속에 아슬하게 줄을 치는 거미를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저 줄에도 한 생이 걸려 있구나 나도 그것으로 한 생을 견뎠다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으면서 행복을 돌돌 말아 너에게 던져줄게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것 그 거룩을 한 줄로 써서 보내줄게 생의 한가운데는 움푹 패였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오늘도 어느 곳에선가 뜬구름 잡는 일이 일어나고 다리에 쥐가 난 사람들이 걸어가고 어느날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낮달을 뚫고 날아간다 그래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바람속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가운데를 생각한다..
그저 얼굴이었으면 해 음악을 뿌리치고 버려야 했던 손등과 건반을 외면하는 사물들을 모두 따라가면서 언제나 그 음에 머무르려고 피아노가 음악 바깥으로 나온다 사람의 볼에 닿는다 '내가 정말이라면' 창비, 2019
봄이 엄마를 데려간다 나는 여기 있는데 봄이 엄마를 데리고 간다 봄이 오면 가만히 서 있던 나무들에게도 이름이 생긴다 꽃이 피면 그 나무의 이름을 불러준다 훔쳐 온 아기처럼 엄마를 감싸 업은 저 봄이 엄마를 데려간다 엄마가 남편 없이 처음 느껴보는 봄인데 나무란 나무 이름 다 불러보고 싶은 봄인데 엄마의 소녀 적 소녀들은 쌍쌍으로 찻집에 들어가고 애도는 죽음보다 먼저 태어나 꽃 피는 대궐의 문을 여는데 봄은 죽음의 계절 흰 눈 위의 흰곰을 병 속에 밀봉하는 계절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게 있다 봄이 꽃들로 만든 포대기처럼 엄마를 데려간다 저 봄 잡아라 나는 눈을 가린 사람처럼 두 손을 휘젓는다 엄마가 숨을 들이쉬면 세상의 꽃나무란 꽃나무 다 들어갔다가 엄마가 더 이상 못 참고 숨을 내쉬면 세상의..
모두 다 손을 잡고 뛰어내렸다 얼굴 가득히 고개가 아픈 옥상 호시절이 저 멀리 기차처럼 지나고 청바지 같은 하늘 속으로 기적이 걸어나가지 않아도 산책이 많은 몸이었습니다 도착할 거라 믿었던 발도 없이 우리들은 늘 세상 속이었고 커지며 사라지며 세상을 고요하게 살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이라면' 창비, 2019
에어 서플라이의 러셀 히치콕은 비싼 돈 내고 공연에 오는 사람들이 늘 최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평생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의 어느 여름 98.7MHz에서였다 그 후로 우연히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담배 연기가 걷히는 것 같다 하늘이 맑아지는 것 같다 에어 서풀라이가 한창 활동했을 때는 있지도 않았던 미세먼지라는 말까지 사라지는 것 같다 공기가 공급되는 것 같다 요즘 대도시의 그저 그런 공기가 아닌 강원도의 진짜 공기가 강원도의 산들이 높이지고 높아져서 별들에까지 이르고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 같다 방금 나온 이 시원한 무알콜 맥주 한 병처럼 별들이 흘러넘쳐 차가운 하늘에 담기는 것 같다 우연히 너와 들어간 양양의 어느 식당에서 수년 만에 에어 서플라..
나무를 다 가지면 내 주변에서 시원한 트럭이 가고 나무 위의 침팬지가 떨어져 내리고 잔디를 깎던 사람의 휘둥그런 안경에 나무를 가진 내가 풀로 날리고 상상이 이토록 푸르고 개도 가고 상상이 짖고 물고 달려가 나를 넘어뜨리고 나는 내 몸의 뼈를 다 버려보기도 하면서 어떤 마음에 대해선 영원히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무라면 그래도 된다고 월간 '신동아' 2023년 4월호
바람이 눈을 가리고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아침 마당까지 내려온 갈매기가 안개를 따라다니더니 방금 빨래 건조대를 넘어트렸다 배가 안 들지 몰라 불안한 트럭이 떠나고 밭일을 포기한 어부는 소주를 마신다 바람에 내던져진 하루 부질없는 사랑시나 끄적이다가 바람벽 흔들리는 방을 나와 우산도 없이 산책을 나간다 바다 가까이 가지 마셔 오늘은 파도가 사나울 거여 이별 통고처럼 자가운 빗방울이 뺨을 후려갈기는데 날개가 돋으려는 나무들이 어깨를 심하게 흔들어 댄다 어차피 더 갈 데도 없는 섬 종일 비 올 듯 그래도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 길이 지워진 외딴 집에 불이 켜졌다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 2019
파란색이 차갑다 생각하지 않아요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고 차갑다 생각한 적 없어요 어려서 그렇게 배웠다고 커서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은 내 생각이 아니죠 골목 깊은 곳의 파란 대문은 동네에서 제일 예쁜 파란색 파란 나라 파란 몸 스머프는 내가 제일 아끼는 파란색 파란색은 백 가지도 천 가지도 넘어요 어떤 파란색은 꿈속에만 있고 어떤 파란색은 어떤 사람에게만 있고 어떤 파란색은 저녁에만 있어요 아직 아무도 본 적 없는 파란색도 있어요 얼마나 많은 파란색이 발견될지 누가 발견할지 나는 너무 궁금해요 물감 뚜껑을 닫는 순간 나와 당신의 파란색은 더 이상 같은 색이 아니죠 나는 내 마음속의 파란색을 당신은 당신 마음속의 파란색을 볼 뿐이죠 화가들은 자신만의 파란색을 가지려고 일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