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 : 시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모음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눈은 처음엔 하염없는 영혼이었네, 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지금 내리는 눈은 제 몸을 숨기며 내리고 있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그렇게, 내리는 눈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네

고요히 음악만이 살아 있는 이 시간을 나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끔씩 내가 이토록 고요히 살아 있는 시간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시간을 <눈 내리는 밤>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차가운 시간 위로 내려와 대지의 시린 살결을 덮어주는 그대 따스한 숨결을 나는 지금 음악처럼 듣고 있네

세상의 후미진 곳에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손바닥을 내밀어 눈물로 젖어드는 하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네, 이런 걸 참 무모한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눈 내리는 밤마다 나는 참으로 무모해지고만 싶은데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무모한 사랑을 확인이라도 하듯 우리는 지금 소리 없는 음악 소리를 내고 있네, 서로를 연주하는 마음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더 깊은 시간, 눈에 젖은 나무들이 비로소 차분히 저희들의 기타 줄을 고르고 있는 이 눈 내리는 밤에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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