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밤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등불 속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소리. 귀고리처럼 매달린 문고리를 흔들다 가는 바람 소리. 공책을 메꿔가는 연필소리만 들린다 그리운 게 많아질수록 살기는 더 힘들어지는구나 처마 끝에 가닥가닥 하얀한 주렴을 치고 주렴이 저희끼리 부딪히며 내는 아련한 여운 속에서
나는 왜 받지도 못한 편지의 답서를 미리 써두어야 했던가 모든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더디게 뻗어오는 눈길 하나를 기다려야 했던가 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묵은 사진첩을 들춰본다 하릴없이 귀퉁이가 다 닳은 일기장을 펼쳐본다 지문처럼 찍힌 가파른 내 안의 등고선을 맴돌다, 자작나무숲과 까마귀와 묘지가 있는 언덕을 지나, 불꽃나무 산채에 이르는 눈발
눈발의 그 부르튼 발등이 보이는 날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아래로, 아래로, 눈꺼풀을 쓸어내리던 그 오랜 버릇대로 눈은 내리고 나는 다만 붉은 열매처럼 잘 익은 알등을 켠다 흐린 불빛이 불러다준, 턱없이 커진 그림자와 함께 적적한 한때를 달랜다 부질없이 설레던 불빛이 한결 고요해졌다
<나의 첫 소년>
창비교육,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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