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고,싶,다,보,고,싶,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
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 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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